〔여행노트〕“모두가 꽃같이 아름답고 꽃 같이 서러워라”소록도(小鹿島)… 한센인의 100년 삶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살아 있는 박물관, '아름다움 뒤에 고통과 눈물이'
소록도(小鹿島)는 섬 형상이 어린 사슴을 닮았다 하며 붙여진 이름이다. 우리나라 남해 서쪽 고흥반도 끝 자락에 있다. 2009년 고흥 도양읍과 거금도를 잇는 소록대교가 개통되면서 수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이었지만 그전까지만 해도 배로 오가는 불편 때문에 찾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여수 보름 살기 11일째인 26일, 차로 1시간 30분을 달려 소록도를 찾았다.
푸른 하늘을 향해 힘차게 솟아있는 건강한 소나무가 해안가를 따라 늘어서 풍광이 아름답다. 쪽빛 바다 넘어 소록대교가 한눈에 들어온다. 어린 사슴처럼 여리고 아름다운 이 섬이 바로 국립 한센병원이다. 섬 전체가 한센인이 치료받는 병원이다.
일반인이 출입할 수 있는 곳이 한정돼 있다. 출입 통제소를 지나니 출입이 금지된 직원 숙소 지대다. 고흥 도양읍사무소 소록도 출장소와 우체국 소록지소까지만 일반인 접근이 허용된다. 이곳은 한센인을 치료하는 병원지대와 직원들이 생활하는 직원 숙소 지대로 구분된다.
한센인이 오면 병동에서 입원 치료를 받는 환자와 중앙리, 동생리 ,남생리, 신생리, 녹생리, 구북리, 새마을 등 7개 마을에 배치돼 생활하면서 치료받는 환자로 나뉜다.
한센병은 나균에 의해 감염되는 만성 전염병이다. 지금은 다제요법으로 치료하면 완치되는 질병이다. 하지만 기자의 초등학교 시절 60년대만 해도 각종 미신 같은 풍문이 나돌 정도로 무서운 전염병으로 여겨졌다. 얼굴과 손을 붕대로 칭칭 감싸고 동냥하러 다니던 한센인이 기억에 남아있다.
이 섬 곳곳엔 일제 강점기 총독부가 한센인을 치료한다며 격리해 통제하고 노역을 시키면서 그들이 겪은 아픔과 눈물의 흔적이 남아있다. 동리 길에서부터 1930, 40년대 지어져 국가등록유산인 붉은 벽돌의 각종 건물을 비롯해 공원에 심어진 나무, 바위 하나 하나 까지ⵈ 수 많은 한센인들의 아픈 손발로 이뤄낸 것이고 닿지 않은 곳이 없다.
출입통제소를 지나 박물관 가는 길, 해변을 따라 만들어진 덱길 옆, 오래된 소나무 사이로 폭 3-4m 도로가 길게 나았다. 길 입구에 ‘수탄장’이라는 안내 푯말이 있다. 일제 강점기 수용된 한센인과 자녀들이 격리돼 있다가 한 달에 한 번 만나면서 눈물과 탄식으로 얼룩졌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한센인 부모와 접촉으로 인한 감염을 막기 위해 자녀들을 직원 지대 보육원에 격리하고 한 달에 한 번 면회가 허용돼 안부를 확인 했다. 길 한가운데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양옆으로 갈라져 혈육을 바라봐야 했으니, 마음의 고통이 어쨌을까?
지금은 수많은 관광객이 찾는 소록도 명소가 된 중앙공원도 소록도 한센인의 땀과 피가 얼룩진 대표적인 곳. 중앙공원은 붉은 벽돌의 검시실과 감금실을 지나 중앙리 언덕빼기에 있다. 잘 자란 아름다운 수형의 소나무를 비롯한 많은 종류의 나무들이 오랜 세월을 견디어낸 자태가 남달라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 환자위안지였던 이곳에 완도 득량 등지로부터 운반해 온 기암괴석과 일본 대만 등지에서 가져온 나무를 심고 연못을 만들었다”라고 안내문에 적혀있다.
2만여 ㎡인 공원을 조성하는데 1940년까지 3년 4개월 동안 연인원 6만 명의 한센인이 밤낮없이 동원되고 아픈 손과 발로 일궈냈다니 나무 한 그루 한그루가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아름다움 뒤에 숨어있는 한센인의 피눈물에 발걸음이 무겁다.
공원 한가운데는 수용된 한센인에게 가혹했던 제 4대 슈호 마사토 원장을 살해해 한센인의 아픔을 세상에 알리고자 했던 한센인 이춘상 기념비가 세워져 당시 그들이 겪었을 고통을 말해 주고 있다.
한센인들이 직접 벽돌을 만들던 벽돌공장 가마터에서 발길을 멈췄다. 성치 않은 몸으로 거금도까지 배를 타고 나가 땔감을 해오고 이글거리는 열기를 견디며 소록도 시설 확장용은 물론 외부 판매용 벽돌까지 하나 하나 구웠다니, 상상하기 쉽지 않다.
“강제 동원돼 공원 조성, 벽돌 만들기 등을 하다가 건강이 나빠져 죽는 사람도 많았다.”고 박물관 기록은 전하고 있다.
1916년 한센인의 진료, 요양 등의 목적으로 설립된 국립소록도병원이 있는 소록도는 일제 강점기 강제 격리돼 생활하던 소록도 사람들의 삶과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살아있는 박물관이다.
홍안의 소년 때 한센병으로 섬살이를 하며 크고 작은 공사에 동원됐던 박순암(순바구)의 이름을 딴 순바구길, 환자들이 소록도 바닷가에서 자갈과 모래를 가져와 건축하고 한때 신도 수가 1천 명에 달했다는 소록도 성당, 소록도에서 사망한 환자들의 유골을 안치하기 위해 1937년 준공한 만령당. 병사지대 식량 배급을 위한 식량창고, 한센인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지어진 옛 녹산초등학교 교사, 1916년 세워진 한센병 전문 의료시설인 자혜의원, 1945년 8월 해방 직후 자치권을 요구하던 주민대표 84명이 희생당한 애한의 추모비, “죽음이 찾아올 때까지 소록도에서 봉사하고 죽어서도 소록도 화장장에서 화장돼 소록도에 묻히고 싶다”라던 마리안느와 마가렛 수녀가 지낸 관사 등 …
소록도 사람들의 삶의 흔적과 한센병 극복을 위한 노력의 기록을 모은 박물관에 전시된 생활 유품 중 저고리와 바지가 유난히 눈에 들어온다.
“ 어머니는 아들의 결혼 예복을 마련하려고 직접 누에를 길러 명주 저고리와 바지를 만들었다. 그 예복을 입고 결혼한 아들은 1년 만에 병이 들었고 새 각시도 떠났다. 어머니는 얼굴이라도 한번 볼 수 있을지 한걸음에 소록도까지 와서 아들에게 명주 누비 바지저고리를 건네고 울음 길을 돌아갔다. 아들은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고 이제는 저고리와 바지만 남았다.” 고 설명이 적혀있다.
박물관에서는 때마침 일제 강점기 총독부에 의해 어릴 때 강제 격리됐던 한국과 대만의 한센병 환자 '두 개의 목소리'가 국립소록도병원 개원 108주년 기념으로 기획전시되고 있었다. 한국 소록도에서 70년을 살아온 남재권 씨는 “ 우리 같은 사람이 살다 간 흔적이 소록도에 배어있으니 그냥 없애 버리지 말고 남길 것은 남기고 보존할 것은 보존해서 교훈으로 삼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밝혔다. 김동일기자 53520@naver.com <저작권자 ⓒ 경기북부이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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